너의 접시. 나의 물병
Exhibition Dates: 2025. 09. 20. – 2025. 10. 18.
Location: ART SOHYANG(아트소향)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
박세란(아트소향 학예실장)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1883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정착한 이래 서양 미술의 아이콘이 된 ‘승리의 사모트라케 Victoire de Samothrace)’ 는 얼굴과 팔을 잃어버렸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불멸의 여신상처럼 정득용의 조각과 평면은 익숙한 인체와 그릇의 형상에서 일부분의 공간을 소멸시킨다. 하지만 다시금 그 곳에서 숨겨진 새로운 형태와 공간을 생성해내며 예기지 못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정득용의 작업은 매우 계획적이지만 동시에 우연적이다. 그 정확한 예로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는 골동품 가게에서 사 온 석고 조각의 한 단면을 즉흥적으로 샌딩 머신으로 같아낸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20년 넘게 밀라노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작가에게 고대의 유물은 매우 일상적인 오브제이다. 정득용의 시리즈는 박물관에서 본 듯 낯익으면서도, 작가가 일상에서 수집한 이름 모를 유럽 장인의 석고와 브론즈 조각을 가져다 재구성한 것이다. 혹은 그의 지인이나 역사적 인물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재현한 뒤, 일부를 지워내어 새로운 면과 공간을 드러낸다. 기존의 조각 형태와 함께 갈아내어 평평하게 다듬어진 평면, 광택 작업을 통해 브론즈의 물성이 돋보이는 면에서 빛을 볼 수 있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예상지 못한 구멍이나 실루엣이 나타난다. 따라서 정득용의 인물 조각은 누군가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조각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있다. 그보다는 샌딩 머신에 갈아져 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며 이미지가 지워지던 순간의 기록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고 과거에 살았던 누군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둥주변의 누군가..(Somebody around column .)>(2019)는 도자기 물레 성형 기법으로 만든 기둥과 그 기둥의 꼭대기와 주변에 누워있는 시리즈의 흉상으로 이루어진 세라믹 작품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없이 모든 사물과 인간을 둘러싸는 공간, 특히 그 주변의 여러 작은 공간에 주목해 온 작가에게, 도예가가 빚어낸 기둥은 또 하 나의 공간, 즉 작은 우주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아름다운 고전주의와 개념미술을 동시에 보여주는 (2019)와 (2019)는 작가가 긴 시간 거주에 오고 있는 이탈리아 문화에 대한 오마주로 이들은 관찰 당하는 동시에 관객을 응시하며, 전시장에 있는 동시대의 인물 조각과 관객 들에게 대화를 건넨다, 아름다운 조각에 더해진 그의 예술적 개입은 새로운 공간과 감각을 일깨우며, 그들이 인사에 낯익은 대상에서 느꼈던 낮설음은 부드럽게 이완된다. 일련의 작업들은 번하는 존재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변지 않는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시 공간을 뛰어 넘어 흔적을 찾는 그의 시선은 평면 작업으로도 전개된다. 이번 전시 제목 《너의 접시, 나의 물병》에 포함된 음식을 담는 빈 용기들은 어느 나라를 가던지 그가 방문하는 고고학 박물관에 꼭 있는 오브제이다 동,서양의 항아리, 밥공기, 접시, 물병 등 갖은 모양의 빈 용기들은 정득용이 오랜 시간 탐구해 온 피사체이다, 작가는 실크,린넨, 코튼과 같은 투명한 자연 직물 위에 오일 베이스의 물감을 이용한 판화 기법으로 다양한 용기의 살루엣을 찍어낸다. 대개 그의 작업은 어떠한 배경 없이 천에 찍힌 용기는 항상 텅 비어있고, 빛의 3원색인 레드, 블루, 그린을 사용한다. 소재와 표현 방식은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반복은 없다. 물체의 각도와 색, 그라데이션을 미묘하게 변화시켜가며 두세 겹의 천을 중첩시킴으로써 작고 여린 이 공간들은 섬세하게 진동한다. 그의 조각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평면 작업 역시 여러 빈 용기들이 겹쳐져 빚어내는 갖가지 다양한 형태들이 우연적이면서 계획적이다. 각각의 실루엣 이미지들은 이전에 자신이 위치했던 지점을 보여주면서도 그 지점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자아낸다. 투명한 여러 천을 겹치면서 만나게 되는 무궁무진한 새로운 공간과 색, 실루엣의 조합은 작가에게 오랜 시간에 걸친 탐닉이다.
현재의 평면 작업은 ‘Contatto(Pieve di Cadore)’(2018)가 발전된 형태이다. 피에베 디 카도레는 베니스에서 활동했던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인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고향이다. 가느다란 지지대에 커튼처럼 설치된 천 위에 작가는 티치아노의 명화 속에서 차용한 항아리, 용기, 물주전자, 교황의 모자등의 오브제의 실루엣을 구현했다. 비물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투명하고 가벼운 천 덕분에 투과 된 빛과 오브제의 실루엣은 서로 대결하기 보다 부드럽게 호흡하고 소통하며, 공간의 유희를 펼친다.
정득용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물질과 비물질을 넘나드는 경계에서, ‘부재’와 ‘만남’을 통해 관객에게 영원한 공간과 빛의 울림을 펼쳐보인다. 그의 조각과 평면은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형태는 단순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그가 자라온 환경의 기억이 끊임없이 만나고 변하고 표출된 ‘흔적’이자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인류 문명의 집약체로 볼 수 있다. 공간은 영원하나 인간은 유한하다. 동서양의 오래된 조각과 오브제의 실루엣에서 고대에 살았던 누군가의 흔적이 현재의 우리와 만나 새로운 세계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도 이 세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 미래의 누군가와 만나게 될 것이다.
Photo@ArtSohyang